8월의 아카시아
텅 빈 집안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현관문을 나섰다.
‘찰칵’
자동 도어록이 잠기는
순간, 찬 바람이 한 쪽 가슴을 휑 하고 관통해 갔다.
‘그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거야. 단지 그것뿐이야……’
차창을 내렸다. 고속화도로를 내지르는 속도만큼이나 차가운 공기가 나의 얼굴을 때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혔지만 곧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돌싱’……
돌아온 싱글! 누가 처음 그리 불렀는지 어감이 슬프다. 아니 내가
슬퍼서일까. 죽고 못사는 사람이 없을 바에야 집안 좋고 인물 빠지지 않는 남자로 고른 게
그였다. 그렇게 ‘결혼’이란 나에게 있어 재미없는 선택으로 운명지워졌었다. 매너
좋고, 자상하며, 외국의 대학을 졸업한 탄탄한 중견기업의
후계자인 일등 남편. 적어도 지금까지 겉으로 보여지는 그 남자의 모습은 그랬다.
가엾은 나의 전 남편…… 처음부터 그는 내 남자가
아니였다. 십 년 동안 그가 안았던 여자는 몇 명이나 될까?
항상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고, 그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결혼 초부터 모든 걸 알았지만 십 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다.
‘풋’ 하고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여섯 해를 사는 동안 내 꿈, 내
열정, 내 사랑이 단 한 번이라도 내 인생에 있었을까.
왠지 내가 너무 미웠다. 차창으로 휘몰아치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나의 긴 생머리가 미친
듯 춤을 추었다. 시속 140km! 묘한 흥분이 나를
들뜨게 했다.
‘돌아온 싱글…… 그래,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야……’
새 집은 나보다 먼저 도착한 이삿짐센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60평 빌라에 살다가 32평 아파트로 왔지만 혼자 살기엔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랄까, 아파트 주변에 펼쳐진 공원 길들. 베란다 너머로 훤히 보이는 학교 운동장도 정겹다.
‘딱’……’딱’……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 휘두르는 배트에 공이 맞아나가는 경쾌한 파열음! 결코 낯설지 않은 정경이다. 아주 어릴 적 추억처럼, 잊혀진 기억의 편린들이 나의 눈 앞에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내가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일까…… 순간, 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일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그가 기적처럼 내 앞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삿짐을 나르던
인부 중 한 사람이었을까…… 넋 놓고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구리 빛 얼굴의 사내. 푹 눌러 쓴 회청색 모자에 감춰진 깊은 눈매, 꽉 다문
입술, 시니컬한 표정의 그 남자……
“혹시 K대학 다니지 않았나요?”
그가 무심히 돌아섰지만, 나의 심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 해 여름 나는 열병을 앓았다.
수능시험을 3개월 앞둔 고3은 인간이 아니다. 열공, 열공, 열공…… 스트레스를 달고 살다 못해 가끔 기괴한 소리를 질러대는 내가 안스러웠던지 언니는 스트레스를 풀게 해준다며, 한 무더기의 언니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내 손을 이끌고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다. 언니네 학교인 K대학과 전통의 라이벌인 Y대학의 야구경기였다. 양 교의 응원단으로 꽉 찬 그라운드의 열기는 처음 야구장을 찾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야, 그 얘기 들었어?
“뭐 상우 선배야 우리 학교의 히든카드니까! 호호호!”
항상 결정적일 때마다 한 방을
터트려서별명이 ‘Mr. 역전의 사나이’라 불리우는 우리
언니의 열렬한 짝사랑, 아니 K대학 모든 여학생들의 우상
‘
엎치락뒤치락 하던
경기는 9회 들어 점수를 내주며 8대5로 K대학교가 뒤지고 말았다.
9회말 투 아웃 만루.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공격은 K대학. 타자는,
“4번타자
우뢰와 같은 환호와, 상대학교 응원단의 야유가 운동장을 찢어놓을 듯 했다.
어느덧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경기장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강속구가 마치 슬로모션처럼 날아왔다. 형언할 수 없이 시니컬한 그 남자의 미소 역시 나의 심장으로 날아와 비수처럼 꽂히고 있었다. 순간, 그에게서 아카시아 향내가 물씬 풍겼다.
‘아, 아카시아……’
그랬다. 나는 그의 미소를 <아카시아 미소>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냉소적이지만 왠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천사의 미소, 아카시아!
그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관중석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창공으로 솟구친 커다란 포물선 아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9회말 역전 만루홈런이었다. 그 순간 내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영혼을 온통 뒤흔들고만 한 송이의 아카시아만이 계속해서 뇌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첫 사랑의 느낌이 이토록 강렬한 것일까. 그는
그렇게 나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기를 쓰고 언니와 같은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언니를 대신하여 밥상머리에서 언제나
어느덧 2학년이 되어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과 함께 캠퍼스에는 또 다른 소식이 만개했다.
“지현이 걔, 김상우 꼬실려고 아버지 빽으로 집에까지 초대했다지 뭐야. 아주
맘먹고 낚아 챈 거지 뭐. 근데 걔 남자 편력이 보통이 아닌데,
얼마나 갈려나 몰라.”
“이번엔 임자
만났지. 지현이 걔 스타라면 사족을 못쓰는 거 몰라?
아주
그 해 봄은 스물 한 살 내
생애 가장 슬펐다. 캠퍼스는
“야, 얘기 들었어?
“아냐, 상우가 지현이 땜에 교통사고 당한거래.”
차에 치일 뻔한 지현언니를
구하다
사람들은 학교 주변 호프집에서
그가 죽었다느니, 불구가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안주거리로 씹어댔다.
그래서 지현언니가
왠지 눈물이 났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언젠가 지현언니가 재벌 명문가의 자제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언니를 통해 들려왔지만 이제 아무도 아카시아 미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잊혀진 존재였다.
자꾸만 저 사내가
신경 쓰였다.
벌써 15년이 흘렀는데,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내 마음에 각인된
아카시아의 채취는 생각보다 강했다.
‘아닐거야,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심 짐 정리를 하는 척 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딱'…… '딱' ……
운동장에는 여전히 경쾌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 여름 날의 함성이, 열기가, 점점 나를 전율케 했다.
“목사님, 이쪽 좀 잡아
주세요.”
이삿짐 센터 사장인듯한 사십 대
남자가 그 사내에게 건네는 말을 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이라니…… ?’
잠시 후 사십 대 남자에게 다가
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아까 청색 모자 쓰신
분한테 목사님이라 그러셨어요?”
“아, 네 목사님 맞아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사십 대 남자는 마치 자기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신의 목사님, 아니
“수고하셨어요. 이거 한
잔 드세요.”
내가 따라주는 음료수를 받아
들고 그 남자는 단 숨에 들이켰다.
“목사님이신 줄
몰랐어요. 목회 하면서 이런 일 하시기 힘들지 않으세요?”
“다 감사하죠. 음료수 잘 마셨습니다.”
상우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따스한 그의
아카시아 미소가 홀연히 나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목사님 언젠가 목사님
교회에 예배를 가도 될까요?”
상우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망울이 유난히 깊었다. 그는 평화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아이들에게 줄 사랑이 많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열병을 앓았던
고3 의 여름 날, 그가 나에게 비수처럼 꽂아
놓았던, 탄산수와 같은 아카시아 미소는 이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시 찾아 들었다. 부드러운 평화를 장착한 채, 그래도 조금은 시니컬한 느낌의 미소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돌 싱!”
그래,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을뿐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