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의 꿈 김춘추 中에서>

 

의자왕은 태생적으로, 복수의 한을 품은 왕의 운명을 타고 난 비운의 군주였다. 신라 출신의 어머니 선화에게서 태어난 왕자로서, 아버지 무왕의 또 다른 왕후인 우왕후 사택비와 사씨 귀족들의 핍박과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라 사택비와 사씨 귀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간신히 그들을 몰아내고 강력한 왕권을 쥐게 된 의자왕은 어머니 선화태후마저 오래도록 심통을 앓다가 승하하자 점점 그동안 쌓였던 원한의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윤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할 때, 선화태후를 모함했던 미실의 증손이자, 대야성주인 품석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윤충은 품석으로 하여금 자결할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품석의 목이 선화태후의 영전에 바쳐진 것이다. 품석의 피를 본 의자왕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실성한 듯 소리쳤다.

“어마마마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 나를 거스르는 자는 모두 목을 베리라!

의자왕은 선화태후가 죽고 나자 이성을 잃고 이미 귀향 보낸 사씨 귀족들을 참형에 처하고, 천명이 넘는 궁녀들을 궁궐에 두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그 후 보위에 오른 지 십년이 지나면서 확실한 왕권을 거머쥔 의자왕은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충언을 하는 신하를 그 자리에서 가차없이 끌고가 목을 베게 하는 등 폭군의 광기가 절정을 치닫게 된다.

“폐하, 고타소는 어찌 하오리까?

"고타소? 오호, 품석의 처 말이렸다? 아직 안 죽였느냐?"

"지금 외궁 감옥에 하옥되어 있나이다."

"그 계집도 미실의 증손이렸다. 당장 끌고 오라 이르거라!"

이때 고타소는 사비궁의 외궁에 있는 지하 감옥에 갇혀있었다. 원래 죄를 지은 환관이나 궁녀를 가두는 감옥이었지만, 시종장이 임의로 고타소를 하옥시킨 것이었다. 의자왕은 미실의 증손녀인 고타소를 죽이고자 하였다.

얼마 후, 시종이 곱게 단장한 고타소를 선화태후의 사당으로 데려왔다. 품석의 생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고타소는 낭군 품석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시종의 거짓말에 속아 단장하라는 시종의 명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곱게 단장한 고타소를 보자, 순간 의자왕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고타소의 얼굴과 분위기가 선화태후와 너무나도 쏙 빼어 닮았기 때문이었다. 고타소의 할머니 천명공주와 외할머니 양명공주는 모두 선화태후의 동복언니로 선화태후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고타소는 마치 선화태후와 판박이처럼 닮았던 것이다. 게다가 한창 피어나는 고타소의 미모는 삼한을 통틀어보아도 가히 천하절색이라고 할 정도였다. 의자왕은 잠시 넋이 빠진 얼굴로 고타소를 바라보았다.

남편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던 고타소는 사당에서 황금관을 쓴 의자왕을 보자 자신이 시종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고타소는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의자왕에게 물었다.

"낭군께서는 어디 계시오?"

시종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고타소를 꾸짖었다.

"어서 어라하께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고타소는 낭군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의자왕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낭군을 한 번만 뵙게 해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처음 의자왕은 미실의 증손녀인 고타소를 함께 죽여 어머니의 영전에 바칠 생각이었지만, 어머니와 너무나도 닮은 고타소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

의자왕은 그런 고타소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네 낭군 품석은 죽었다. 대야성 함락 후 자결하였다 들었다.

고타소는 의자왕이 품석을 죽였다고 확신했다.

“네 이놈 네가 낭군을 죽인 것이 틀림없다. 내 아비가 김춘추이시니라. 너를 가만 놔둘 것 같으냐? 반드시 너를 죽이고 백제를 멸할 것이니라!

시종이 눈을 부라리며 고타소에게 호통쳤다.

"미친 것! 어라하께 그런 망발을 지껄이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어서 끌고 나가라!"

“놓아라, 이놈들. 간사한 악귀들아. 약조를 어기고 항복한 장수를 죽이는 치졸하고 비겁한,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 언젠가 우리 신라가 너희 백제를 반드시 짓밟아 멸망시켜 이 원수를 반드시 갚아줄 것이다.

호위병사들이 고타소의 팔을 꺾어 끌고 나가려 했다.

“되었다. 감옥에 가두어 두거라.

의자왕은 고타소를 보자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천명이 넘는 궁녀를 거느리고 있는 의자왕이었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호통치듯 달려드는 계집은 처음 보기도 했거니와 죽이기에는 그 미색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고타소를 죽이기 전에 좀 더 두고 보고 싶었다.

 

 

고타소야 고타소야, 너를 가슴에 묻는다. – 복수의 칼을 품다.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어 사위 품석은 백제군의 강요로 자결했고, 딸 고타소는 행방을 알 수 없으나 품석을 따라 자결한 것으로 사료된다는 소식이 당도하자, 춘추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고타소야! 네가 어찌 이 아비를 두고 먼저 떠났느냐? 어찌......"

춘추는 충격으로 비틀거리다 기둥에 기댄 채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춘추는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 품석이 죽었다면 고타소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다 성이 함락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군의 부녀자들은 노예로 전락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장수나 귀족의 아내들은 대개 자결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희가 달려와서 춘추를 위로 하였다.

"낭군, 인명은 제천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

문희는 온종일 춘추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춘추는 문희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침묵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기둥을 내리치고는 절규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신라의 대장부가 어찌 간악한 백제를 없애지 못한단 말인가?"

춘추는 넋이 나간 듯 문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의관도 갖추지 않은 채 갑자기 마당에 있는 말에 올라 타 급하게 대문을 나섰다. 문희는 전혀 딴 사람이 된 듯한 춘추의 태도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춘추는 그 길로 미친듯이 말을 몰아 입궁하여 선덕여왕의 처소를 찾았다. 춘추가 의관도 갖추지 않은 채로 선덕여왕의 처소에 이르자, 시종장이 춘추의 앞을 가로 막아 섰다.

"춘추공, 어찌 의관도 아니 갖추시고 입궁하셨나이까? 집으로 돌아가시어 의관을 갖추어 오소서."

이때, 문희가 춘추의 의관을 든 시녀와 함께 나타났다. 문희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춘추를 보며 말했다.

"낭군, 의관을 가져왔나이다."

춘추는 시녀가 든 의관을 낚아채 그 자리에서 입고서 시종을 밀치고 선덕여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춘추는 무릎을 꿇고 읍하며 말했다.

"폐하! 소신의 딸이 백제왕 의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사옵니다. 딸의 피맺힌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춘추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쏟았다. 선덕여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타국에 원병을 청하는 것은 아국의 주권을 손상시킬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하느니라. 진흥대제 이래, 우리 신라는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거늘, 너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허리를 굽혀 원병을 청해서야 되겠느냐? 그간의 고구려와의 관계로 보아 우리의 요청을 들어줄 명분이 크지 아니하고, 원병을 보낸다 해도 원병을 빌미로 고구려가 우리 신라를 속국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 너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니, 조금만 더 심사숙고 해보자. 지금 고구려의 정세가 심상치 아니하니 좀 더 상황을 알아보고 결정할 것이니라.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휩쓸리면 아니 된다. 지피지기의 자세로 우리 신라가 국력을 키운다면, 언젠가는 너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니라."

선덕여왕의 뜻이 확고하여 춘추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나온 춘추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였다.

'의자야, 기다리거라. 내 기필코 백제를 멸하여 이 원한을 갚으리라!'

백제군이 신라 서남변의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옛 가야의 성들을 공격하자 불과 한달 만에 40여개의 성이 항복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는 막리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180여명의 대신을 살해 한데 이어 영류태왕마저 시해하였다. 정변으로 고구려 조정을 한 손에 쥔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동생 태양왕자의 아들 보장을 태왕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고구려 최후의 태왕 보장태왕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덕여왕은 대전회의를 소집하여 말했다.

"고구려의 대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새 태왕을 세웠으니, 이번 기회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청하고자 하는데,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춘추가 앞으로 나서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을 사신으로 보내주소서! 소신이 연개소문을 설득하여 원병을 청하겠나이다."

선덕여왕은 한동안 고심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본래 나의 사촌 자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춘추공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 일을 춘추공에게 일임하겠소."

"소신의 뜻을 거두어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춘추는 사신단을 꾸려 고구려로 떠날 채비를 마친 후 유신을 찾아가 말했다.

"16년 전, 나와 공은 한 몸이 되어 나라의 고굉이 되기로 맹세하였소. 이제 내가 호랑이 굴과도 같은 고구려에 가는데, 내가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공은 어찌하시겠소?"

유신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공이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세컨데 나의 말굽이 고구려왕과 연개소문의 집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 그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겠소?"

춘추는 크게 기뻐하며 유신의 주먹을 잡았다.

"고맙소. 내 오늘 공과 서로의 분신이 될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 싶소. 나는 공의 분신이 되고, 공은 나의 분신이 되어 죽기까지 함께 하면 좋겠소."

"나 또한 공의 뜻과 같소."

춘추는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흘린 피로 하늘에 맹세하였다.

"하늘이시여, 저 춘추는 유신공과 한 몸이 되고, 분신이 되어 죽기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에 맹세하나이다."

이어 유신이 맹세하자,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60일 안에 돌아올 생각이오. 60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게 변고가 생긴 길 줄로 아시고 폐하께 아뢰어 주시오."

"60일이 지나도 공께서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내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 도성을 공격하겠소."

"고맙소."

춘추가 사신단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하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마중나와 춘추와 수행원을 고구려 태왕이 거처하는 안학궁에 데려온 후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한창일 때 연개소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신라가 우리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지 아니한지가 오래이거늘, 갑자기 사신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오?"

"대국의 태왕께서 얼마 전에 보위에 오르셨는데, 어찌 경하 드리지 아니할 수 있겠소이까?"

", 들으니, 얼마 전 공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던데, 공이 사신으로 온 것은 바로 우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공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겠소?"

춘추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연개소문의 말에 움찔하여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왔을 뿐이오.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이까?"

"무릇 나라의 신하된 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사적인 일로 대의를 그르치는 것이오. 신라의 재상인 공께서 백제에 대한 사적인 원한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나라의 꼴이 뭐가 되겠소? 하루빨리 사적인 원한을 버리고 신하된 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시기 바라오."

춘추는 연개소문에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비록 연개소문이 실질적인 권력자라고는 하나, 신라의 왕족이며 선덕여왕 다음 가는 명실상부한 신라의 2인자인 자신에게, 똑같은 재상으로서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타이르듯 말하는 연개소문의 무례함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이번 기회에 어떤 형태로든 신라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춘추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춘추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함을 견지했다. 백제의 의자왕에게 원한을 갚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모도 견딜 수 있었다.

"대막리지께서 이 몸을 오해하신 듯하오. 이 몸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왔을 뿐이외다. 신하는 오로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된 도리를 다함일 뿐이외다. 신하가 사적인 욕망을 위해 처신한다면 그것은 곧 임금을 능멸한 것이고 만고의 역적이 아니겠사옵니까. 여하튼 대막리지의 말씀, 마음에 새겨듣겠소이다."

순간 연개소문의 눈썹이 움찔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선왕인 영류태왕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연개소문을 빗대어 훈계한 것이 아닌가. 춘추의 범상치 않은 풍모와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언변에 연개소문은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평정심을 잃지 않는 춘추를 날카로운 눈매로 한 동안 쳐다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 몸은 중요한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 하오. 즐거운 연회가 되기를 바라겠소."

연회장을 나선 연개소문은 곧장 보장태왕을 알현하였다.

"신이 헤아리건데, 얼마 전, 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춘추가 사신으로 온 것은 아국에 원병을 청하여 원한을 갚기 위함이 틀림없사옵니다. 춘추는 왕실에 왕자의 씨가 마른 신라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이옵니다. 신이 듣기로 그 자는 문무를 겸비한 자로서 탁월한 지략과 덕을 가진 인물로 추앙받는다 들었사옵니다. 그래서 신이 만나본 즉, 역시 그 비범하기가 보통 인물은 아니었사옵니다. 장차 춘추가 왕위에 오른다면 저희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될 게 분명하옵니다. 이 기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억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보장태왕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신을 억류하는 것은 상례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리하여도 괜찮겠소?"

"태왕께 무례를 범하여 억류하였다 하오면, 그만이 아니겠사옵니까?

다음 날, 춘추는 고구려 시위의 인도를 받아 보장태왕의 처소를 찾았다. 보장태왕의 좌우에는 검을 찬 수십 명의 호위병사들이 도열하여 있었다. 춘추는 보장태왕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지금 백제가 독사나 돼지처럼 우리 신라의 영토를 침탈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아국의 임금께서 대국의 원병을 얻어 치욕을 씻고자 소신을 사신으로 보낸 것이오니, 바라옵건데, 태왕께서는 원병을 파병하여 아국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죽령과 마립현은 본시 아국의 영토인데 신라가 침탈하였으니, 만약 신라가 원병을 원한다면 마땅히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하지 아니한다면, 그대는 신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춘추는 보장태왕이 신라에 원병을 보낼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억류할 속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춘추는 작심을 하고 말했다.

"나라의 영토를 반환하는 일을 어찌 일개 신하인 소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것은 소신의 역량 밖의 일이옵니다."

보장태왕은 일부러 대노하는 척하며 명했다.

"여봐라! 저 자가 짐의 명을 업신여기니,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당장 하옥하거라."

춘추가 사신단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떠난지 60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유신은 입궁하여 선덕여왕을 알현하였다.

"폐하, 고구려가 무도하게도 사신으로 간 춘추공을 억류하고 있으니, 마땅히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응징해야 할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일이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춘추를 보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을......'

선덕여왕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춘추는 나의 분신과 다름이 없소. 내 마음 같아서는 춘추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이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그럴 수가 없구려."

"지금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태왕을 시해하고 새 태왕을 세운 직후라 민심이 안정되지 아니하였사오니, 군대를 내어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한다면, 필시 전쟁을 꺼려 춘추공을 귀환시킬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한동안 고심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 나라의 명운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

경외병 1만기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에 이른 유신은 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내 듣건대, 열사는 나라의 위태함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재상이신 춘추공께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억류되어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열사의 의지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히 싸운다면, 한 사람이 능히 백 명을 당해낼 수 있거늘, 무엇이 두렵겠는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

유신의 말이 끝나자, 병사들이 창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소인들 죽기를 각오하고 장군을 따르겠나이다!"

고구려 국경을 넘어선 신라군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성루에서 이를 본 고구려 파수장이 고구려 동남변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에게 전령병을 보냈다.

"신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옵니다. 저들의 기세를 당해내기 힘들 듯 하오니, 속히 후퇴하여 원병을 청하소서."

 

 

이 무렵 백제의 의자왕은 고타소의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와 왠지 신비감조차 느껴지는 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 은근히 고타소를 설득하고 있었다. 고타소는 품석이 살아있을 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결을 결심하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자왕으로부터 백제에서 살면 어떠냐는 회유가 시작되자 어쩌면 의자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타소는 일부러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어느덧 고타소에게 안달이 난 의자왕은 고타소를 별궁으로 옮기고 시녀들로 하여금 극진히 모시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자왕은 술이 취해 고타소가 있는 별궁을 찾았다.

“나의 모후께서도 신라의 공주였느니라. , 너를 이 백제의 우왕후로 삼을 수도 있으니 오늘밤 내 처소에 들라. 그리할 수 있겠느냐?

“신라와 백제는 본디 한민족이온데, 이처럼 원수국이 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옵니다. 저를 왕후로 삼아주신다면, 신라와 백제 양국에 평화의 가교가 되는 일이오니, 양국 간에 큰 기쁨이 될 것이오며, 백제와의 평화를 원하셨던 저희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고타소의 말에 의자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밤, 고타소는 화장을 곱게 하고 의자왕의 처소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미색이 출중했던 고타소는 이제 열여덟 살, 절정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백옥 같은 피부에 별빛 같은 눈망울하며, 앵두 같은 입술, 부드러운 섬섬옥수는 아름답다 못해 고혹적이었다. 의자왕은 혼이 나간 듯 고타소를 품에 안았다. 고타소는 최대한 의자왕을 안심시킨 후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려고 했으나 침소로 들기 전, 욕통에서 목욕할 때부터 시중을 들며 감시하던 상궁과 시종들 때문에 비수를 감추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폐하, 불을 꺼주시옵소서.

“아니다. 내 너처럼 아름다운 몸을 본적이 없구나. 불을 끄지 않고 너를 품을 것이다.

“그러시다면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소녀는 이미 폐하의 것이옵니다.

고타소는 최대한 의자왕을 안심시키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의자왕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의자왕을 온 몸으로 한껏 받아들이는 고타소의 눈에 이슬이 맺혀 떨어졌다.

이미 늦게까지 마신 술에 취한 의자왕은 고타소를 밤 깊도록 품은 후 기가 빠져 한숨을 토해내며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의자왕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되자, 고타소는 머리에 꽂은 긴 옥비녀를 빼어 들었다. 옥비녀로 잠자고 있는 의자왕의 목에 정확히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단박에 숨통을 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불도 켜져 있는 터라 천우신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옥비녀를 잡고 내리 찍으려는 고타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의자왕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 순간, 고타소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부여잡고는 있는 힘을 다해 의자왕의 목을 내리찍었다. ‘악’하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불과 하얀 요에 의자왕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옥비녀는 의자왕의 숨통을 빗나가고 말았다. 목에 큰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진 못했던 것이다.

“이 요망한 계집”

갑작스런 소란에 내시와 궁녀, 호위병사들이 왕의 처소로 몰려왔다. 의자왕은 피 흘리는 목을 손으로 부여잡은 채 극도로 분노하여 호위병사에게 명을 내렸다.

“이 계집을 당장 끌어내어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라!

호위병들이 고타소를 끌고 나가는 순간, 고타소는 발악을 하며 악을 썼다.

“의자야 네 이놈, 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를 저주할 것이다!

고타소가 몸부림을 치며 악을 쓰자 호위병들은 고타소의 팔을 무자비하게 꺾고, 머리채를 잡고는 끌고 나갔다.

신라의 왕족이자, 후에 태종무열왕이 된 춘추가 가장 사랑했던 딸 고타소는 이렇게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속옷바람에 끌려가 사지가 잘리고 목이 베이고 말았다.

 

 

감옥에 갇힌 지 60일째, 이미 죽음을 각오한 춘추는 딸 고타소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어린 고타소는 설화를 좋아하여 춘추는 고타소를 무릎에 앉힌 후 삼국 각지에 떠돌아다니는 설화를 이야기해주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춘추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 듣던 고타소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순간, 고타소가 귀토지설의 설화를 듣다가 재미있다며 손뼉 치던 모습이 춘추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렇다. 나 또한 토끼가 거북과 용왕을 속였듯이 임기응변으로 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

춘추는 옥졸을 불러 말했다.

"여보시오. , 선도해 대형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나의 뜻을 대형께 전해주시오."

옥졸의 말을 전해들은 선도해가 감옥으로 와서 춘추를 면회하였다. 선도해는 보장태왕의 외삼촌으로 얼마 전에 춘추에게 비단 300필을 선물 받았기 때문에 춘추의 부름에 응해 주었다.

"춘추공께서 내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니,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할 생각이 있으신 게요?"

"바로 그렇소. 나를 석방하여 주시면, 반드시 우리 임금을 설득하여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토록 하겠소. 태왕을 알현하게 해주시오."

"좋소이다."

선도해의 주선으로 보장태왕을 알현한 춘추는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다.

"죽령과 마립현은 본시 대국의 영토인데, 아국이 침탈한 것이오니, 태왕께서 소신을 귀환시켜 주신다면, 우리 주상을 설득하여 반환토록 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겠나이다."

그 무렵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던 밀정으로부터 춘추를 구하기 위해 유신이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그간의 전쟁으로 유신이란 이름은 가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수년 전 유신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던 연개소문으로서는 유신이란 인물의 크기가 태산과 같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유신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당과 첨예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데다, 지난 겨울 대신들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5부 귀족들의 반발이 거센 이때에, 신라와 전면전을 한다는 것은 고구려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에 마침, 춘추의 의사를 전해들은 연개소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춘추의 맹세를 들은 보장태왕은 크게 기뻐하는 척하며 시종장에게 춘추를 신라로 전송할 것을 명하였다.

유신이 이끄는 1만의 결사대가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떼의 군마가 뿌연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유신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방진(사각형 모양으로 진영을 구축하는 진법)을 펼쳐라!"

방진을 구축한 신라군의 진영에서 궁수들이 맨 앞렬에 나서 시위를 겨누자, 백기를 든 병사 하나가 말을 몰아 달려오며 외쳤다.

"쏘지 마시오! 우리는 신라의 사신단을 국경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고구려 병사들이오."

그때 춘추가 수십 명의 수행원들과 수백 명의 고구려 병사들과 함께 말을 몰아 나타났다. 유신은 혹시라도 복병이 있을까 봐 병사들에게 전투태세를 명한 후 춘추를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린 춘추가 유신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였다.

"유신공, 공을 적국에서 이렇게 뵈니, 반갑기 그지 없구려."

"춘추공, 무사하시어 참으로 다행이오. 어찌 나오신 것이오?"

"귀토지설의 설화를 이용하여 고구려왕을 속인 것이오."

춘추는 유신에게 선도해와 보장태왕을 속인 일을 이야기하였다. 유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공께서 토끼처럼 꾀를 내어 고구려왕을 속이셨구려. 공께서 조금만 늦으셨더라면, 전쟁이 일어날 뻔 하였소."

“고맙소, 공께서 이리도 나를 생각하여 출병했으니 틀림없이 고구려도 위협을 느꼈을 게요.

춘추의 사신단 일행이 유신에게 인도되자, 고구려 병사들은 왔던 길로 돌아갔다. 고구려 병사들이 종적을 감추자, 유신은 결사대를 이끌고 춘추의 사신단 일행을 호위하여 서라벌로 향하였다.

서라벌에 도착한 춘추는 백제의 사비성에서 군졸행세를 하다 넘어온 신라의 밀정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춘추의 딸 고타소가 사비성까지 끌려가 천하의 호색한으로 이름난 의자왕에게 능욕을 당하고 사지가 잘리는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춘추는 밀정을 불러 자초지정을 자세히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렸다?

“틀림없사옵니다. 의자왕의 잠자리에 끌려간 고타소궁주께서 날도 밝기 전에, 속옷만 걸친 채 끌려 나와 끔찍하게 참수당하고 말았사옵니다. 사비성 군졸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사옵고, 소인이 분명 이 두 눈으로 고타소궁주의 시신이 들려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사옵니다.

춘추는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네, 이놈…… 의자…… 내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켜 네 간을 씹어먹으리라……”

분에 못 이겨 눈앞에 보이는 탁자와 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밀쳐대던 춘추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무서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한동안 절규하던 춘추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더니 핏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네 이놈 의자…… 내 반드시 이 원한을 갚아주리라…… 고타소야 고타소야…… 이 아비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 너를 대야성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데…… 이 아비가 너를 사지로 몰았구나. 미안하다. 고타소야……”

어려서 어미를 잃었고, 커서는 시집간 지 여섯 달 만에 눈앞에서 낭군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적국까지 끌려가 철천지 원수인 의자왕에게 능욕을 당하고 끔찍한 참형에 처해진 방년 열여덟의 꽃다운 자신의 딸, 고타소에 대한 미안함에 춘추는 오열하고 또 오열하였다.

춘추는 이때 백제와 의자왕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한과 함께, 60일 동안 고구려에 자신이 억류되어 있지 않았다면 고타소를 어떻게든 구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고구려에도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훗날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케 하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